기획자들 중에는 개발 작업을 알면 기획 작업에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개발 지식을 쌓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동일한 이유로 디자인 지식을 쌓으려는 기획자는 많지 않다.
사실 기획자에게는 디자인 감각이 개발 지식보다 더 많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기획자 입장에서 개발 작업이 더 많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 게다.
디자인은 얼핏 누구나 작업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결과물은 디자이너가 아니면 좋은 것을 골라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개발 작업은 옆에서 계속 지켜봐도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그러나 결과물은 명확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가 쉽다.)
그러니 기획자 입장에서는 작업 과정이 가려져 있는 개발 쪽이 궁금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 무엇을 익혀야 좋을 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경력이 없는 기획자라면 물론일 것이고
연차가 조금 오른 기획자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막연한 상태에서 지식을 얻으려다보니 엉뚱한 부분을 공부하는 경우도 보인다.
보통은 기획자가 개발 작업을 알고 싶어한다면 아래 두가지 이유가 아닐까.

1. 어떤 기술을 쓸 수 있는지 알아야 무엇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
혹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기획자가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떠올리고 창의적일 수 있으므로 좋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내 생각엔 전혀 그렇지 않다.
'핸드 크림을 얹은 잘 익힌 야구공'은 극도로 창의적이긴 하지만 절대 음식은 아니다.
재료와 조리법을 모르고 한 창작는 창의가 아니라 무의미이다.
기획자의 창의성이라는 것은 논리가 기반이 되어야 마땅하고
따라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획자가 개발 지식을 쌓는 것은 매우 쓸모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의 지식이라는 것은 '어떤 기술을 통해서 무엇이 가능한가'이다.
그 외의 개발 지식이라면 기획자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 모두 버려라.
'AJAX 를 쓰니 드래그앤드롭으로 장바구니 추가가 되더라.'
'SilverLight 를 쓰니 동영상 위에 입력창을 만들 수 있더라.'
하는 것을 알면 충분이 공부한 것이다.
AJAX 나 SilverLight 구조 따위를 배우려는 스트레스까지 기획자가 감당할 필요는 없다.

2. 개발자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알아야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획자의 영역이 조금 다르지만
원칙대로라면 기획자가 PM/PD 가 되어 팀장 역할을 해야 한다.
시간 비용, 작업 비용, 그리고 결과물까지 모든 게 관리 업무인데
개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알아야 작업 계획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개발 단계를 기획자가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실 공부할 수가 없다. 개발자도  해보기 전엔 모르므로..)
보통은 개발자의 작업 과정을 이미 기획자도 알고 있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말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발생한다. 뒤로 갈수록 작업이 논의했던 바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작업 계획이 어긋난다면 이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변경 사항이 얼마나 있었는가.'
변경은 정책을 바꾸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 추가하는 것도 포함한다.
기획자가 배워야 할 것은 개발 단계나 과정이 아니라
내가 '기획에 어떤 변경을 가할 때 개발 과정에서는 어떤 영향을 받는 가'이다.
자주 일어나는 예가 있다.
기획자 : 결과물이 뭐라도 좀 보여야 결정을 내리지..
개발자 : 뭐가 좀 결정이 돼야 개발을 하지..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기획자의 실수다.
결과물을 보고 나서 정책을 수정한다면 그때부터 일정 계산은 기획자의 손을 떠나게 된다.
기획자는 관리 요소를 누구에게도 넘겨주면 안될 것이다. 절대로.
그러나 효과가 큰 간단한 대응책도 있다.
하나. 결정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최선에서 최악까지 개발자에게 모두 알려준다.
둘. 일초라도 빨리 알려준다.
셋. 모든 것을 알려줬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이것을 책임전가 기법이라고 부르면 좋다..)
이것은 어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으로 배울 수 밖에..
잘라 말해서 기획자는 개발자의 작업 단계를 알 필요가 없다.
알고자 하는 사항이 있다면 개발자의 예측에 전적으로 의지해도 좋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린다면 '소프트웨어공학'을 권한다.

기획자가 개발 지식을 쌓는 것은 성공적인 프로젝트에 매우 도움되는 일이다.
그러나 위의 것은 굳이 공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기에 끄적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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