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동미참 훈련에 다녀왔다.
아 더운 날씨. 으 늘어지는 몸.



1일차.

한석이에게 속아서
버스는 7시 반에 출발하는데 6시 50분에 집에서 나왔다. 젝일. 30분 동안 뭐 하나.
그러나 버스는 도어 투 도어 서비스.
날 훈련장 바로 앞까지 배달해 준다. 비싼만큼 편리하다.
(버스는 훈련 부대와는 무관한 민간 업자다)

입소하면 '뷔페식' 관물함에서 방탄과 탄띠를 지급 받고 전투모는 그 자리에 맡겨 둔다.
순서대로 가져가라고 할 거면서 왜 뷔페식이라고 적어놓았을까.
아! 내가 직접 가져가니까? 오케이. 이해했다.
근데 도대체 쓰지도 않고 넣어둘 전투모를 왜 가져오라는 것일까.
아하! 방탄과 탄띠를 반납하지 않을까봐 담보로 받아두겠단 게로군!
그래. 난 담보 대출을 하였다.

입소 절차를 위해 줄을 서는데 어떤 은갈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지나다닌다.
예비군 입소시에 어느 기관 공무원이 와서 참관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인 가보다.
근데 이 사람.. 미안하지만 너무 재수없게 생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만해 보인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거지? 당신 정체가 뭐야.
고도의 훈련을 받은 심리전의 대가인 듯도 하다.

소속 동대를 정확히 확인한 나는
3반인 줄 알고 그 기나긴 줄을 끝까지 기다렸는데..
"선배님 전국 단위는 모두 4반이십니다."
젝일. 줄 다시 서야 하잖아. ㅠ.ㅠ
난 79 번 받았다.

CBT 강의 중.
어떤 중위가 자꾸 낯이 익다.
뭐지. 논산 훈련소에 있던 사람이라던데 거기서 본 건가..
아하!
그래 당신은 이혁재를 닮았군요!

사격을 하러 올라갔다.
역시 난 늠름한 군인이 아닌지라 엉성한 티를 내고야 만다.
노리쇠 전진과 동시에 소매가 끼어 버렸다.
조교도 벙쪄서 잡아당기는데 그게 어디 잘 빠지나. (미안해요. ^^)
그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쏴 간다.
난 결국 소매를 빼고 뒤늦게 대강 쏴 댔다.
시력이 좋은 덕에 조준은 금방 했다만 호흡이 엉망이다.
탄착군은 어디 가고 내려찍은 것처럼 수직선을 그렸다.

와 이제 퇴근 시간이다. 다들 먼지 나게 뛰어간다.
그러나 난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버스는 같은 시간에 출발하니까.



2일차.

시가지 전투인지 싸가지 전투인지를 하러 간다.
한석이가 동대장 한 분을 가리키더니 국어 선생님 같다고 한다.
오 과연!! 목소리가 단전에서부터 나온다. 발음도 좋고 성우보다 뛰어나다.
내 가청 주파수를 모두 점령당한 기분이다.

날씨가 덥다. 27도.
앞 분대 분대장이 매우 용맹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부분대장조 약진 앞으로.."
수길씨가 말한다. "약진이 무슨 뜻이야?"
한석이가 말한다. "살금살금"
음.. 굿.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 분대장도 카리스마 있게 옹알거린다. "1조, 2조 웅얼웅얼. 약진 앞으로."
우리는 날렵한 동작으로 걸어나갔다. 살금살금.
햇살 스며드는 탄흔지에 몸을 누이고 잡담을 하는데 '삐잇-' 소리가 난다.
"위치에서 10분간 휴식하겠습니다."
젠장! 방금 그늘에서 나왔는데!

저 멀리 서바이벌 장비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있다.
아하 페인트 탄을 쏴볼 수 있겠구나.
우리 차례다. 근데 장비가 왜케 지저분 해? 그래도 입었다.
삐잇-. "10분 휴식 하겠습니다."
에이 지저분해서 입기 싫었는데 입기 전에 쉬라고 하지.. 그래 한 번 쉬어주마.
그리고 휴식이 끝났다.
"선배님들. 중단하고 다음 교육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젝일. 내키지 않는 거 기껏 입었더니 총 한 번 못 솨보고.

이 곳 식당 밥은 인간이 먹을 게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PX 에서 라면을 사 먹는데, 여긴 줄이 매우 길다.
도대체 저 식당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유지가 되는 것일까..
결국 으.. 3일 내내 라면을 먹어야 하다니.
소시지도 먹었다. 분홍색 공업용 소시지 그거 비슷한 거.

교육 중에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청설모가 짬통을 뒤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윽.
까치 몇 마리도 동참 했다. 아 불쌍한 건가 좋은 건가..
어어.. 청설모 녀석. 뭔가를 집어간다. 식량을 찾은 모양이다.

절대 믿기지 않을 얘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예비군 훈련 와서 정말로 죽을 뻔 했다. (헉!)
낡은 훈련용 소총의 멜빵 끈이 풀어지는 건 예삿일이고
이번에도 내 앞에서 걷던 사람의 멜빵이 휘릭 풀렸다.
어깨총 상태에서 윗 멜빵이 풀렸으니 어깨를 축으로 소총이 반원을 그린다.
원심력을 고스란히 담은 소염기가 내 눈 바로 앞으로 휙 하고 지나갔다.
순간 난 머리를 내려치는 켄신의 검을 받아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천어검류 마지막 필살기 소총참.



3일차.

방탄을 집으려는데 조교가 씩 웃으면서 한 개를 건네준다.
생각없이 받았는데 보니까 51번.
분대장 번호라서 앞 사람이 안 받고 다른 거 가져갔구만.
하지만 난 한석이랑 연번으로 서려고 60번을 집어왔다.
조교는 짜증난다는 표현을 크게 담은 한숨을 쉰다.
그냥 받아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점심 시간에 PX 에 뛰어 가려면 한석이랑 붙어있어야 하거든.

입소 등록하는데 은갈치 양복 아저씨가 또 서 있다.
저 사람. 3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분위기도 3일째 똑같다. 한결같이 불쾌하다. 거만하고..
나만 그렇게 느낀 모양은 아니다.
한석이가 말한다. "단지 보기만 하는데도 기분이 나빠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린 결론을 내렸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오늘은 산을 자주 오른다.
그런데 연막탄 불꽃 때문에 수풀에 불이 붙었다.
(조교가 곤란해지니까 어느 훈련장인지 안 적겠다. 아, 조교를 위해 포기한 게 많다. 흑.
휴대폰도 금지하므로 3일 내내 사진도 안 남겼다. 찍기 좋은 장면 많았는데 아쉽다.)
조교가 놀라서 불을 막 끄는데 사람들이 얼른 달려가서 도와주었다.
그 때 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예비군을 보았다. (절대 퇴근 시간이 아니었다. 훈련 중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니. 아 대한민국 예비군은 유사시에 제 몫을 하겠구나.
그런데 불이 번지지 않을 즈음 되니까 또 다시 무관심해지는 사람들.. 뭐야 이거.
그래도 다행히 잘 진화했다.
조교와 우리만의 비밀.

이제 다 끝났다.
집에 가면 된다.



며칠 놀았더니

아 출근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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