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전제의 파괴 - 1
케이_
2006. 6. 24. 14:24
어쩌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느닷없이 가치관에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때면 이것은 춘장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 마냥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도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뇌의 저 안쪽이. 이사한 날 아직 짐 정리를 안한 시점처럼 마구 헤집어져 있는데.
뭐. 그래도 꺼내어 쓸건 다 꺼내쓰지만 아무래도 매우 불편하다.
바로 오늘 그런 일을 겪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전제를 두고 논리를 따져온 시점에서.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이라는 질문을 받아버렸는데.
내용을 살짝 내 시점으로 옮겨와서 화두를 던져보면.
"초월적인 기준의 전제는 과연 어떻게 옳다고 보장하겠는가."로 귀결된다.
공돌이 인생 9년으로 귀납력만이 논리의 전체로 인지하고 살아온터라.
전제가 깨지는 순간. 생각을 평생 안하고 살아온 사람이 되어버려 변명 한마디 못했다.
그런데 이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니!
좋다. 대전제가 사라짐을 인정하자.
이젠 어떤 행위와 결과가 나타나도 그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아니. 옳다 그르다라는 표현조차 사용할 이유가 없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뭐 어쩌면 옳고 그름의 규명과 선악의 규정이 인위적인 강압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주도 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대전제가 깨졌음은 절대 거스르지 말자.)
심지어 개체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한 자유 의지가 다른 개체를 해하여도 그것에 정과 부를 가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도대체 여기에 어떤 기준이 첫번째 실마리가 되어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없을 땐 빈털터리의 규모에서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다.
모든 현상을 발생시키는 단위 개체의 존재 의미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존재에 대해 서양 철학을 통해 공부 할때. 이름은 관계를 통해 부여된다는 결론을 전해받은 기억이 있다.
내 책상위의 칫솔이 나에게는 칫솔이지만. 성형머신에게는 고무와 폴리프로필렌일 것이고. 운송사 직원에게는 수화물이겠고. 3006년의 사람에게는 쓰레기이거나 박물관의 전시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성에게 칫솔은 그 무엇도 아니다.
나와 칫솔의 관계에서 칫솔은 이를 닦는데 쓰이는 것이 매우 옳다. 선악의 대전제는 전혀 없지만. 누가 뭐래도 이것은 매우 옳다.
이것이 내가 배워온 존재에 대한 사유의 결론 중 가장 정확한 것이었는데.
이로써 무전제 상태에서 행위의 당위 가치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관계가 존재를 규명하지 않을 땐 어떠한 행위가 발생해도 그것은 악도 선도 아니지만. 관계가 생기고 존재가 발생하면 그 투영된 존재 간의 행위에는 분명 악과 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사실 평소의 상대주의적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내 뇌가 아직 이사 첫날이라 사유가 많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충분한 화두가 부족해 철학의 수준이 미미하다. 오늘 나를 깨우신 그분과 더 많은 대화가 있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 어쨌든.
만약에. 내가 죽음에 아무런 피해 가치를 느끼지 않고 이후 인생의 가치에도 관심이 없다면. 어떤 악랄한 살인마가 나를 죽여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내가 부여한 관계에서 그는 살인마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는 행복 추구를 했으니까. 여기에 절대악은 커녕 상대악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Zero-Sum 마저도 아니고 오히려 생산적인 행위가 있었게 아닌가.
혹시나 내가 죽음에 최고의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이건 그야말로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살인마는 나의 협조자이고 나는 그의 지원자가 되는 셈이다.
비약이 심한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저기 죽고 싶어 안달인 나와 살인마와의 관계라면 전혀 비약적이지 않은 듯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 가치는 어떨까.
예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99%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는데도. 대부분의 수험생이 공무원에게 돌아가는 불필요한 혜택에 자신을 관여시켜 찬성한다고..
그들은 적어도 공무원의 혜택에 충분한 관계적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99%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지만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들이 공무원이라는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 존재는 실재한다. 그리고 서로간에 합리적이므로 그 가치는 악이 아닌 선이다. 비수험생마저 관계에 끼어들면 실체화되는 존재가 또 다른 모양이겠지만..
그러고보니 광신도와 사이비 교주도 서로간에 선의 추구를 하고 있는건가..? .......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처음의 주제로 다시 돌아갔다.
나와 다른 인간. 또는 사회나 자연이나 우주나 그 어떤 크고 작은 개체 사이에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 또는 부정하거나 더 나아가 인식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 관계를 맺었고 어떠한 존재를 형상화했느냐에 따라 합리화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인데.."
(어차피 철학은 나를 위해 사유하는 이기적인 것인데다. 좀 더 큰 사유는 오늘의 그 분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을것 같으니까..) 아직까지는.. 내가 써먹을 결론만을 내리기로 했다.
내가. 사회에 의해 인위생성된 선악의 가치 판단과 그 기준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또 다시 사회로 발현하는 이유는.
내가 관계를 통해 실체화시킬 상대라는 존재도 나에게 그러한 가치를 똑같이 적용해 주기를 바래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러했던 것 같다. 남이 선을 추구하기를 바래서 나도 선을 표방했던 모양이다.
물론 남에게 선을 바라고 악을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악이고. 남에게 악을 요구하면서 혼자서 선을 지향한다면 그것도 사실 정상은 아니다.
같은 논리로. 앞으로는 성악설을 주장하며 악하게 사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휴.. 그래도 아직 결론을 낼수는 없지만.. 오늘은 더 이상은 생각 않기로 하련다.
하지만 간단하고 쉬운 예도 하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아무런 강요 없이도 저절로 내가 손해보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은..
그 어떤 대전제 없이도!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받고 싶은 존재로 실체화 된다면.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 동안 아무리 잃는게 많아도 그게 절대선 아니겠는가.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변하고. 심지어 생활이 달라져도. 그건 절대 선이다..
그럴때면 이것은 춘장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 마냥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도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뇌의 저 안쪽이. 이사한 날 아직 짐 정리를 안한 시점처럼 마구 헤집어져 있는데.
뭐. 그래도 꺼내어 쓸건 다 꺼내쓰지만 아무래도 매우 불편하다.
바로 오늘 그런 일을 겪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전제를 두고 논리를 따져온 시점에서.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이라는 질문을 받아버렸는데.
내용을 살짝 내 시점으로 옮겨와서 화두를 던져보면.
"초월적인 기준의 전제는 과연 어떻게 옳다고 보장하겠는가."로 귀결된다.
공돌이 인생 9년으로 귀납력만이 논리의 전체로 인지하고 살아온터라.
전제가 깨지는 순간. 생각을 평생 안하고 살아온 사람이 되어버려 변명 한마디 못했다.
그런데 이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니!
좋다. 대전제가 사라짐을 인정하자.
이젠 어떤 행위와 결과가 나타나도 그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아니. 옳다 그르다라는 표현조차 사용할 이유가 없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뭐 어쩌면 옳고 그름의 규명과 선악의 규정이 인위적인 강압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주도 하지 않았지만 인간에게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대전제가 깨졌음은 절대 거스르지 말자.)
심지어 개체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한 자유 의지가 다른 개체를 해하여도 그것에 정과 부를 가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도대체 여기에 어떤 기준이 첫번째 실마리가 되어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없을 땐 빈털터리의 규모에서 시작하는 것이 상책이다.
모든 현상을 발생시키는 단위 개체의 존재 의미부터 생각해보기로 했다.
존재에 대해 서양 철학을 통해 공부 할때. 이름은 관계를 통해 부여된다는 결론을 전해받은 기억이 있다.
내 책상위의 칫솔이 나에게는 칫솔이지만. 성형머신에게는 고무와 폴리프로필렌일 것이고. 운송사 직원에게는 수화물이겠고. 3006년의 사람에게는 쓰레기이거나 박물관의 전시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성에게 칫솔은 그 무엇도 아니다.
나와 칫솔의 관계에서 칫솔은 이를 닦는데 쓰이는 것이 매우 옳다. 선악의 대전제는 전혀 없지만. 누가 뭐래도 이것은 매우 옳다.
이것이 내가 배워온 존재에 대한 사유의 결론 중 가장 정확한 것이었는데.
이로써 무전제 상태에서 행위의 당위 가치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관계가 존재를 규명하지 않을 땐 어떠한 행위가 발생해도 그것은 악도 선도 아니지만. 관계가 생기고 존재가 발생하면 그 투영된 존재 간의 행위에는 분명 악과 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사실 평소의 상대주의적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내 뇌가 아직 이사 첫날이라 사유가 많이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충분한 화두가 부족해 철학의 수준이 미미하다. 오늘 나를 깨우신 그분과 더 많은 대화가 있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 어쨌든.
만약에. 내가 죽음에 아무런 피해 가치를 느끼지 않고 이후 인생의 가치에도 관심이 없다면. 어떤 악랄한 살인마가 나를 죽여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내가 부여한 관계에서 그는 살인마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는 행복 추구를 했으니까. 여기에 절대악은 커녕 상대악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Zero-Sum 마저도 아니고 오히려 생산적인 행위가 있었게 아닌가.
혹시나 내가 죽음에 최고의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이건 그야말로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살인마는 나의 협조자이고 나는 그의 지원자가 되는 셈이다.
비약이 심한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저기 죽고 싶어 안달인 나와 살인마와의 관계라면 전혀 비약적이지 않은 듯도 하다.
그렇다면 사회 가치는 어떨까.
예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의 99%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는데도. 대부분의 수험생이 공무원에게 돌아가는 불필요한 혜택에 자신을 관여시켜 찬성한다고..
그들은 적어도 공무원의 혜택에 충분한 관계적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99%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지만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들이 공무원이라는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 존재는 실재한다. 그리고 서로간에 합리적이므로 그 가치는 악이 아닌 선이다. 비수험생마저 관계에 끼어들면 실체화되는 존재가 또 다른 모양이겠지만..
그러고보니 광신도와 사이비 교주도 서로간에 선의 추구를 하고 있는건가..? .......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처음의 주제로 다시 돌아갔다.
나와 다른 인간. 또는 사회나 자연이나 우주나 그 어떤 크고 작은 개체 사이에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 또는 부정하거나 더 나아가 인식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 관계를 맺었고 어떠한 존재를 형상화했느냐에 따라 합리화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인데.."
(어차피 철학은 나를 위해 사유하는 이기적인 것인데다. 좀 더 큰 사유는 오늘의 그 분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을것 같으니까..) 아직까지는.. 내가 써먹을 결론만을 내리기로 했다.
내가. 사회에 의해 인위생성된 선악의 가치 판단과 그 기준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또 다시 사회로 발현하는 이유는.
내가 관계를 통해 실체화시킬 상대라는 존재도 나에게 그러한 가치를 똑같이 적용해 주기를 바래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러했던 것 같다. 남이 선을 추구하기를 바래서 나도 선을 표방했던 모양이다.
물론 남에게 선을 바라고 악을 추구한다면 그야말로 악이고. 남에게 악을 요구하면서 혼자서 선을 지향한다면 그것도 사실 정상은 아니다.
같은 논리로. 앞으로는 성악설을 주장하며 악하게 사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휴.. 그래도 아직 결론을 낼수는 없지만.. 오늘은 더 이상은 생각 않기로 하련다.
하지만 간단하고 쉬운 예도 하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아무런 강요 없이도 저절로 내가 손해보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은..
그 어떤 대전제 없이도!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받고 싶은 존재로 실체화 된다면.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 동안 아무리 잃는게 많아도 그게 절대선 아니겠는가.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변하고. 심지어 생활이 달라져도. 그건 절대 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