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뭔가 먹고 싶다. 근데 먹을 게 없다. 안되겠어. 나가야지."
일어나 모자를 썼다. 나는 그렇게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헉헉. 안돼. 못하겠어. 귀찮음이 사라지질 않아!!"
결국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난 절대로 나갈 수 없었다. 극도의 귀찮음이 정신을 지배했다.
광장공포증에 걸린양 신발이 두려웠다.
바깥 공기가 폐에 들어오면 한 순간에 온 몸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여 집에서 만들었다. 우유 소스 라파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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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라스페라 쉐프가 아니라서 그릇에 묻은 소스를 닦아내진 않았다.


만드는 과정은 이러했다.

나가지 않기로 결심이 서자마자 모자를 집어 던지고 주방으로 슬렁슬렁 옮겨갔다.
그런데 낭패다. 그럴싸한 재료가 아무것도 없다. 윽.

나갈 수 없으니 재료를 사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배고픔은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법이다.

요즘 한창 파스타를 즐겨보는 통에 이런저런 얘기를 좀 들었는데
우유를 이용해 크림 소스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한동안 계속 파스타가 먹고 싶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서식하는 모든 걸 채집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이것이 최선이다.

우연히 오징어짬뽕 라면을 수렵하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라면이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스파게티에 국수 소면을 쓸 뻔 했다.
우선 껍질을 잘 벗기고 분말 스프와 건더기 스프를 정성스럽게 제거하였다.
하여 라파게티 을 획득했다.

어머니가 숨겨둔 소금통을 찾았다.
난 의적이므로 내게 필요한 50 알갱이 정도만 절취하고 나머지는 돌려놓았다.

냉장고에는 충분한 양의 우유가 자라고 있었다. 한 컵을 수렵하였다.

설 연휴에 전을 부치며 분명히 올리브유를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전 부치면서 다 쓴 모양이다. 하여 어쩔수 없이 포도씨유를 포획했다.
팬의 면적을 얇게 두를 정도의 양만 채집했다.

난 고소한 걸 좋아하므로 슬라이스 치즈도 사냥했다.
슬라이스 치즈는 무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치즈 사냥에는 왠만큼 노련했으므로 다치지 않고 한 개만 잘 잡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 좋게 야채실에서 오이를 발견하였다.
너무 많이 없어지면 행적이 탄로나므로 손가락 길이 만큼만 잘라서 들쳐업고 왔다.

요리에는 양동 작전이 사용되었다.
성동격서! 정신이 없어야 재료들이 맛 없어질 기회를 잃는다. 난 초짜니까 머리를 쓴 게다. 훗.
레인지의 한 쪽에는 면 끓일 물이, 다른 쪽에는 우유를 졸일 포도씨유가 불을 쬐고 있다.
오이는 포도씨유에게 들들 볶이고 있었지만 불쌍하지는 않다. 죄인은 기름형을 달게 받는다.

시기가 잘 맞아 거의 동시에 라면과 우유를 투하할 수 있었다.
헷갈려서 반대로 넣는다면.. 으 모든 게 끝이다.
그럼 난 물 탄 우유를 곁들인 라면 튀김을 먹게되겠지.

아찔한 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이제 나만 잘 하면 된다. 다행히 약간은 양손잡이 기질이 있다.
오른손은 우유를 젓고 왼손은 라면이 익었나 젓가락으로 끊어가며 불 끌 시기를 살폈다.

소스를 약한 불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라면이 먼저 익어 시차를 두고 작업할 수 있었다.
대신 우유가 졸기 전에 라면이 불어버리면 안되므로 면을 찬물로 헹군 후 물을 다 따라냈다.
그리고 이제 면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으므로 소스에 소금을 넣고 불을 확 올렸다.

우유는 금방 끓어 크림 소스가 되었기 때문에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치즈와 면을 넣고 약간 볶아주니 곧 먹어도 좋을 분위기가 풍겼다.

이렇게 하여 요리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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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크림 소스 스파게티 재료를 사러 가기 귀찮았던 한 남자의 우유 소스 라파게티"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나조차도 두려웠다.
반찬이 없으면 먹을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에 마늘장아찌와 김치를 필히 챙겼다.
그러나 의외로 맛이 좋았다. 고소한 맛은 내가 낸 것이 아니라 젖소님이 내신 것이니까.

크림 소스 파스타라기보다는 크림 소스 비빔면에 가깝다.
스파게티 면대신 라면을 이용할 때는 소스를 좀 덜 졸이는 것이 좋겠다.
라면은 생각보다 소스를 잘 빨아먹는다.

맛은 크림 소스 파스타와 전혀 무관하다.
편의점에서 파는 크림 소스 컵라면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만든 라파게티치고는 흡족했다.

매우 만족스러운 주말이다.
이제 카페 라떼 만들어 마셔야지.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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