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와 기획자. 디자이너.
이들은 최고의팀이지만 각자가 따로 있을때는끝없는 수다의 대상이다. (우리회사는 그런 문화가 적어서 심심하고 아쉽지만.. 아니. 아쉽지는 않다. 어쨌든 심심하다.)
보통은 이렇게 티격태격하는게 이쪽 업계의일하는 재미다.
디자이너는 잠을 헌납하고 영감을 붙잡아멋진 창작물을 만들어냈는데 기획자가 예술을 이해 못해서 삐져있고.
기획자는 적용하고 싶은 개념이 너무 많은데 개발자가 비현실적이라고 거부해서무식한 공대생에 대한 분노에 떨고 있고.
개발자는 바로 어제 야근이 많다고 애인한테 차였는데 기획자가일정을 3개월이나 늦출만한 추상적인 개념을 기획해 와서 죽어버릴까 고민중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진짜 IT 기업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이게 바로IT의 매력이지!" 라고 낭만에 빠질 수 있겠지만..) 난 중역이 되지 않는한 이렇게 표준적인기업에서는 절대 일하지 않을거다. ^^
어쨌든. 재미있는 글이 있어 읽다가 트랙백을 걸어왔다.
어떤 게임 서버 프레임워크에 관한 얘기인데.최고 수준의 아주 완벽한 설계를 묘사하고 있다. 기술기획자의 입장에서는 목에 힘줘도 될만한 뿌듯한 성과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 자체는 그냥 시시한작업의 결과이지만. 마지막 줄이 재미있다. 이 프레임워크에 대한 많은 장점들을 침이 마르도록 열거한 뒤. 딱 한개의 단점을 적은 마지막 한줄은 이렇다.
"하지만 이 구조는 채택되지 못했다. 프레임워크 기반의 구조는 '게임 서버'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느렸다."
이렇게 완벽하고 편리하고 이상적인 프레임워크가 사실 결국은 삽질이었던 것이다.
트랙백한 글에서는 개발자의 기술 기획이 문제였지만. 실제로 일반기획에서도 상황은마찬가지다.
자주 이런일들이 벌어진다.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자신하며 내놓은 것들을 잘 뜯어보면. "당연히 그렇게 되면 최고로 좋지. 그런데 그게 실현 가능해?" 라고 말하게 되는 일이 많다.
기획자의 창의력은 예술가의 창의력과는 다르다. 화가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제목을 붙여도 되지만. 기획자는 이름부터 붙이고 나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사항까지 완비하지 못했으면. 아직 아이디어를 찾아낸 게 아닌거다.
나는친구들이문득 떠올린 아이디어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면 종종 이런식으로 말한다.
"워어 그런거 되면 당연히진짜 좋지. 근데 잘 이해가 안가는게 있는데 지금 얘기 추상명사만 싹 빼고 다시 말해줘."
다시 설명했을때 여전히 말에 막힘이 없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그 친구와 그주제로만 대화를 한다.
하지만 두번째 설명도 또 추상명사에의존하면 그 아이디어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와! 나도방금 좋은 게임이 하나 떠올랐다.
"배경은 몽환적이고 캐릭터는 선명해서 유저가 빠져들기 쉽고. 격투 스킬을 사용자가 직접 구현해 넣을 수 있어서 게임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들게 해주면 좋겠다."
to 디자이너 : 배경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대신 캐릭터는 대비적으로 선명하게. 집중도 높여주세요.
to 개발자 : 유저가 직접 격투 스킬 편집 가능하게 해주세요.주먹과 발 기술 정도만 조작할 수 있으면 되고 디테일한 묘사는 디자이너분과 상의해 주세요.
다음날 디자이너는 "잠깐 얘기좀 하자"고 말하고. 개발자는 메신저가 "자리비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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